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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안리 순창 훈몽재 - 나의 밥동무가 순창 훈몽재에 공부하러 이사를 갑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2. 2. 23. 05:01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아 교제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처를 받는다.바보이기 때문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붉히고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봐 가능한 한 좋은 방향으로 나가자고 하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손해 보는 우리는 호소하면서 그러지 않으려고 항상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지만 매번 만나면 이야기 보따리가...

    그래서 좋았어.다만 여행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여행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도우선생님이라 허전하기는 했지만 늦은 결혼으로 아직 딸을 돌보는 바람에 바빠서 자주 못 만나도 만나면 항상 편했다.그런 도우 선생이 멀리 떠난다고 한다.안타깝다

    가끔 저랑 점심에 밥 먹곤 했던 '밥동무' 도우 선생님궁중 무용의 기초도 가르쳐 주던 도우 선생 안동 전시회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운전하며 함께 가던 도우 선생이 이제는 완전히 흥몽제에 공부하러 순창에 정착한다고 한다.

    순창에 한달 살러 갑니다.흥몽제에 가서 공부도 할 거예요.다시 돌아올 줄 알았어.정가도 도우 선생님 덕분에 알 수 있었다.도우 선생의 딸이 정가단 개미의 일원으로 정가가 무엇인지 알고 공연도 영상으로 보면서 알게 됐다.코로나19 터지기 전 노래방에 가끔 갔었는데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그애의 재능이 아깝다고 했더니 역시 종가당아리에서 활약을...

    이제 완전히 순창에서 사는 것 같아요.흥몽재에서 열심히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00도 함께 공부합니다.도우 선생의 말을 들으니 흥몽재 선생은 유명한 분이라 중국에서도 찾아온단다.주리적 퇴계학파로 주자 이후 일인자인 퇴계 이황 쪽 학자인 것 같다.

     

    처음부터 귀농하기로 결심한 것 같아. 도우 선생님은 잘할 수 있어!부자되세요기도할게. 나중에 임야를 사면 한 평만 빌려달라고 했어.모과와 산마늘을 심음으로써 거창한 계획까지 둘이서 세웠다.

     

    훈몽재가 궁금하다고 해도 자기도 공부하러 가는 곳이니 오지 말라고 해서 간 적도 없다.나중에 한번 따로 가보자

    일단 훈몽재에 대해서 궁금해서 네이버 언니에게 물어봐서

    출처 : 네이버(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마사요시

    전북 순창군 쌍지면 둔전리에 조선 전기 김인후 선생이 세웠다.

    개설

    훈몽재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1548년(명종 3) 순창 점암마을 백방산 기슭에 세운 강학당이다.김인후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는 견해로서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이를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고암 양자징[1523-1594], 월계 조희문[1527-1578] 등 당시 유명한 학자를 배출하여 순창 지역이 호남 유학의 산실임을 입증한다.

    훈몽 재위치

    훈몽재는 국도 21호선에서 순창군 쌍지면 시산리와 중앙리 중간도로를 따라 둔전리를 거쳐 백방산 자락의 주룡천변에 있다.주소는 순창군 쌍지면 둔전2길 83 [둔전리 45-1]

    변천

    김인후가39세가되던1548년에후학인재양성을위해처향인순창군쌍치면점암마을에초당을짓고훈몽이라는현판을걸고강학을하였다.

    김인후가 훈몽재를 처음 세운 곳은 대학암상이었다고 하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세 손자인 자연당 김시서[1652-1707]가 1680년(숙종 6) 무렵 근처에 자연당을 짓고 훈몽재를 고쳐 후학을 양성하였다.세월이 흘러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유림들이 다시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송강정철, 율곡 이이[1536~1584]의 위패를 봉안하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 훈몽재가 중건됐으나 1951년 625전쟁으로 다시 소실됐다. 이후 순창군에서 김인후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려 후세에 전승•발전시키고 나아가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여 예절•유학 등 전통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년 11월 9일 현재의 자리에 훈몽재를 중건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9일에 개원하였다.

    모양

    흥몽제의 고인돌 흥몽재[강학당], 자연당[숙박시설], 양정관[교육관 및 숙박시설], 삼연정, 하연정, 대학암, 흥몽재의 고인돌, 식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리석음을깨운다는훈몽재,김인후가낙향할때자신의자연귀의사상을자연가라는시로표현하였는데,김시서가자연당이라는이름으로복원한자연당매산홍직필[1776~1852]의훈몽재기에수록된김인후의교육이념인몽이양정夢二養正] [어리석음] [어리석음]의글씨]의글씨]가진사람

    <훈몽재 양정관 하연정>은 김인후가 쓴 1600여수의 시에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인 <삼연> 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이다.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평평한 대학바위에는 송강 정철이 썼다는 대학바위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김인후는 조희문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대학을 강의했다고 한다.

     

    현황

    훈몽재에서는 유학전문교육반[한문학과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훈몽재에 거주하면서 '논어', '맹자' 등의 유학경전을 전문으로 공부], 방학예절교육반[초등학생·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방학기간 중 1~4주간의 예의범절 및 인성교육], 단기체험학습반[초등학생·고등학생·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방학기간 중 2~4주간의 교육 및 여성교육, 단기체험학습반으로 짧은 기간 중·대학생을 실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다.

    여름방학에는 전주대 원광대 안동대 상지대 등 50여명의 학생이 유학교육반에 참여하고 있다. 유학교육반 마지막 단계에는 전국 유학의 대가들을 초청해 김인후의 가르침과 도의, 절의, 문장 등 3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강연을 열고 있다. 2013년에는 3번째의 서미트가 열렸다. 2011년 1월부터 고당의 김충호가 흥몽제 산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훈몽재 인근 조선시대 훈몽재 터 훈몽재 유지가 2012년 11월 2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훈몽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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